우리는 다르니까, 다른것을 사랑해

둑, 제방.

(09/26)소그룹원들과 식사를 하면서”여러 교회에 다니는 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최근”카나앙(안나 가)”기독교인과 함께”플로팅(floating)”기독교인이 많다는데 주변에도 그런 사람이 꽤 있는 듯했다.플로팅 크리스천은 한 교회에 정착하지 못하고 오늘은 이 교회, 내일은 저 교회에 나오는 기독교도를 의미한다.그들이 정착하지 못하고, 두둥실 떠오르는 이유에는 여러가지 있을 것이다.실제로 플로팅(?)를 하는 소그룹원의 이야기에 따르면 자기가 하나의 교회에 정착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는 교파에 의해서 교회에 의해서 이점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라고.오늘 기분이 좀 우울하고 혼자서 한다면 또래가 많지 않은 예배가 일찍 끝나는 교회에 가서 사람이 그리워지면 청년이 많은 교회에 간다.평균 직장 근무 기간이 1년을 겨우 넘는 시대에 교회라고 다를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아무튼 얘기의 결론은 하나의 교회를 결정하는 것이 여러모로 유익하다는 것이었다.제교회에 다닌다보면 1. 교단/교회의 미묘한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을 느끼는거나 2)그것을 느낄 수 없는 만큼 공동체에 겉돌기 때문이다.하나의 교리 체계만을 인정 가톨릭보다 개신교의 장점(이자 단점)은 여러 교리를 폭넓게 인정하는 것이지만, 경험 차원에서 다양한 교리를 알고 배우는 것은 좋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착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돌아다니와 혼란이 가중되기 때문이다.

이전의 기고에서 여러번 밝혔지만 제가 좋아하는 기독교 농담의 하나는 이것이다.질문:신은 세계를 창조하기 전에 무엇을 하고 있었습니까?답:그런 질문을 하는 너 같은 녀석들 때문에 지옥을 만들고 계셨다.이 농담이 재미 있는 신의 창조와 심판이라는 주제를 아주 유쾌하게 삐었다만 아니라 개신교의 부정적 측면을 전면 공개하기 때문이다.네,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질문을 허가하지 않습니다.어제(즉, 플로팅을 함)소그룹의 멤버도 이런 고백을 했다.교회에서 질문을 하면 죄를 짓는 기분이 의문을 품고 자신의 신뢰가 부족한 것 같다고.아마 그들은 상기의 농담이 전혀 농담처럼 안 들릴 거야.”교회를 왜 여러곳에 다니고는 안 되나요?”,”천국과 지옥도 오락가락하는 때문이다.”뭐, 이렇게.그러나 이것이 초대 교회의 정신인가 하면, 그렇다고는 할 수 없다.”강론 있는 곳에 교회가 있다”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고대 교회에서는 일종의 토론 문화가 당연히 존재했다.실제, 아니면 아우구스티누스나 우아시리우스, 오리게네스의 위대한 교부가 탄생하지 못 했을 것이다.무엇보다 종교 개혁으로 탄생한 개신교는 수많은 질문과 의문에 답하기 위한 “폭발”그 것이다.”아직 생각도 않고 감정도 잘 느낄 수 없는 유아에게 침례파를 주기로 의미가 있는가?”여기에 “아니오!”라고 대답한 교단이 침례파인(침례파는 유아 침례파 불인정), 지도자를 선출하는 조직 운영 방식에 따라서는 감리교와 장로교가 나뉜다.세례로 보느냐, 침례파와 보느냐에 의해서, 또 교단이 갈리기도 있다.

출처 : https://i.imgur.com/B9d06ID.png

누군가는 이런 교단의 갈림길을 “분열”로 볼 수도 있다.물론 교단이 갈라지는 과정에 소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한편으로는 “신학적 풍요로움”이라는 결과를 낳았다고 생각한다.”본질에는 일치를 비 본질에는 관용을, 이 모든 것에 사랑을.”감독관을 뽑아 교회를 관리하는 것이 좋은지 교인이 1표씩 행사하고 지도자를 선출하는 것이 옳은지, 원로 목사의 권력은 어느 정도 배정하는 것이 좋은지, 침례파인지, 세례인지, 예배 순서와 형식은 어떤가…… 그렇긴…솔직히 이들 모든 것은 비 본질적인 것이다.잘못된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다.그래서 그 사상과 이론이 이단적이지 않으면 얼마든지 포용과 인내심을 발휘하는 것 아닌가.개신교의 정신은 “자유”라고 생각한다.자유의 별명을 붙일 수 있다면”차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닌가.항상 교회에서 문제가 된다”관계”문제 역시 어떤 의미 차이에 대한 무당 인정에서 나온다.”도대체 그 아이는 왜 그렇게 행동하니?’ 그럴 때부터 관계의 문제가 시작되니까.그러나 우리 모두는 서로 다른 존재로 지어지고 다른 존재로서 행동하는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 그 차이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그래서” 다른 것을 사랑한다는 것”은 또”사랑하는 것”이다.

다시 한번 소그룹의 멤버와의 통화에서.”왜 공동체에 모여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다름 아닌 공동체 아니면”서로 사랑하는 “이라는 계명을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말과 생각에서 “사랑”이라는 계명을 지키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렇네, 서로 사랑하지 않다고.비록 그가 원수라도 “그러나 공동체에서 부딪치고 보면 알 수 있다.서로 사랑하기는커녕 자기 자신조차 사랑하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란 말을 들을 때 너무 쉽게”아멘”이지만, 가끔”나는 사랑 받을 가치가 있는 존재인가?”라는 의문에 빠진다.그래서 당신은 사랑 받기 때문에 태어났다는 말을 온몸으로 지키고 행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다.그러나 서로의 차이는 역설적이게도 서로를 사랑할 수 있게 한다.걱정의 덩어리인 당신이 하는 걱정은 ” 다른 날”이 볼 때 무슨 걱정도 안 된다.진로에 대한 고민이 많은 당신의 고민은 ” 다른 날”이 볼 때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는 고민이다.서로의 차이가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것이다.우리는 다르니 달라서 서로를 사랑할 수 있다.차이를 사랑할 때 처음으로 서로를 사랑할 수 있다.물론 누군가의 차이가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되는 것이 흔하다.하지만 그래도 끊임없이 차이를 경험하게 때 우리는 “사랑”이라는 계명을 지키고 실천할 것이다.그야말로 크리스천의 궁극의 사명이라고 생각-누군가 다르게 생각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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